

병동에서 근무하다 보면 식사를 마치고 30분도 안 돼서 "밥은 언제 줘요?"라고 물으시는 환자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깜빡하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병실 위치조차 기억하지 못해 복도를 배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2024년 기준 국내 65세 이상 치매 환자 수는 약 90만 명에 달하며, 이 중 알츠하이머병이 75.5%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출처: 중앙치매센터). 제 경험상 많은 분들이 초기 증상을 가볍게 여기다가 병이 상당히 진행된 후에야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억력 저하와 해마 손상의 관계
치매 환자분들을 보면서 가장 특이했던 점은 70년 전 고향 이야기는 생생하게 하시면서도 방금 전 식사 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뇌의 해마(hippocampus)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해마란 측두엽 안쪽에 위치한 기관으로, 새로운 정보를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합니다.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은 이 해마 부위가 가장 먼저 손상되는 퇴행성 뇌 질환입니다. 뇌 MRI 검사를 보면 해마 부위가 눈에 띄게 위축되어 있고, 양쪽 두정엽까지 작아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타 아밀로이드(beta-amyloid)라는 독성 단백질이 신경세포 사이에 축적되면서 8~10년에 걸쳐 서서히 뇌세포를 파괴하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제가 돌봤던 환자분 중 한 분은 손자 이름은 기억 못 하시면서도 6.25 전쟁 당시 피난 가던 이야기는 마치 어제 일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해마가 손상되기 전에 이미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 정보는 대뇌피질에 남아 있기 때문에, 오래된 기억일수록 오히려 더 선명하게 유지되는 겁니다. 반면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을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는 손상된 해마를 거치지 못해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의 진행 단계별 증상
알츠하이머병은 경도인지장애(MCI, Mild Cognitive Impairment)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악화됩니다. 경도인지장애란 또래에 비해 인지 기능이 떨어져 있지만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MMSE(Mini-Mental State Examination) 검사에서 20~23점 사이로 나오며, 이 시기가 바로 치매 진행을 막을 수 있는 골든 타임입니다.
병동에서 보면 초기에는 주로 날짜를 헷갈려 하거나 물건을 둔 위치를 잊어버리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중기로 넘어가면 계산 능력이 떨어지고, 익숙한 길도 찾지 못하며, 글씨를 쓰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는 두정엽(parietal lobe)이 손상되면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두정엽은 공간 인지, 계산, 언어 이해를 담당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말기가 되면 전두엽(frontal lobe) 손상으로 인해 성격 변화가 두드러집니다. 전두엽은 판단력, 계획 수립, 충동 조절을 담당하는 부위입니다. 솔직히 이 단계에서는 환자분들이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하거나 욕을 하시는 경우가 있어서 보호자분들이 가장 힘들어하셨습니다. 보행 장애, 대소변 실금까지 동반되면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상태가 됩니다.
루이소체 치매(Dementia with Lewy bodies)는 또 다른 유형인데, 알츠하이머병 다음으로 흔합니다. 뇌 신경세포 안에 루이체(Lewy body)라는 비정상 단백질 덩어리가 생기면서 발생합니다. 이 치매의 특징은 생생한 환시(hallucination)입니다. 환시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사물을 보는 증상을 말합니다. 제가 만난 한 환자분은 벽에 아이들이 놀고 있다며 계속 대화를 시도하셨고, 파킨슨병처럼 손이 떨리고 몸이 굳는 증상도 함께 나타났습니다.
조기 진단과 예방의 중요성
경도인지장애 단계에서는 아직 뇌의 가소성이 남아 있어 적절한 개입으로 치매 진행을 늦추거나 심지어 호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뇌 가소성(neuroplasticity)이란 뇌가 새로운 신경 연결을 만들고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가장 확실한 예방법은 유산소 운동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주 3~5회 규칙적인 운동은 뇌 보호 신경 인자(BDNF, 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 생성을 촉진하고, 베타 아밀로이드를 분해하는 효소를 증가시키며, 뇌 혈류를 개선합니다(출처: 대한치매학회). 제 경험상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꾸준히 걷기 운동을 하신 분들은 같은 진단을 받았어도 인지 기능 저하 속도가 확연히 느렸습니다.
치매 위험 요인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같은 혈관성 위험 인자는 뇌졸중을 유발해 혈관성 치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흡연은 뇌 혈류를 감소시키고 산화 스트레스를 증가시켜 신경세포 손상을 가속화합니다.
인지 예비능(cognitive reserve)을 높이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인지 예비능이란 뇌 손상이 있어도 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뇌의 역량을 말합니다. 지속적인 학습 활동, 악기 연주, 독서, 사회적 교류 등이 뇌 신경망을 촉촉하게 유지해 치매 발병 시기를 늦춥니다. 병동에서 음악 치료를 받으신 분들은 말기 단계에서도 감정 표출이 훨씬 원활했고, 보호자와의 정서적 교감도 더 오래 유지되었습니다.
현재 치매 치료제로는 도네페질, 리바스티그민 같은 아세틸콜린 분해 효소 억제제가 사용됩니다.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은 기억과 학습에 관여하는 신경 전달 물질입니다. 이 약물들은 아세틸콜린 농도를 높여 인지 기능 저하를 일시적으로 늦추는 효과가 있습니다. 완치는 아니지만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고 일상생활 능력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환자의 감정 기억을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편도체(amygdala)는 감정을 처리하는 뇌 영역으로, 해마나 전두엽보다 늦게까지 기능을 유지합니다. 제가 본 많은 환자분들은 구체적인 사건은 기억 못 해도 그때의 기분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보호자가 짜증을 내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환자는 그 내용은 잊어도 불쾌했던 감정은 계속 남아 있어 점점 더 예민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병동에서 일하면서 느낀 건 치매는 환자 혼자만의 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족들의 소진이 심각하고,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초기 증상을 무심코 넘기지 말고, 건망증이 잦아지거나 성격이 변한다 싶으면 바로 신경과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 MMSE 검사와 뇌 영상 검사를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경도인지장애 단계에서 발견하면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운동, 학습, 사회 활동을 통해 뇌 역량을 끌어올리고, 위험 요인을 관리하면 치매 발병 시기를 최대한 늦출 수 있습니다. 미리 준비하고 대응하는 것이 환자와 가족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입니다.